[작문 시험을 AS해 드립니다] 3. 인상을 남긴 작문_ 이재훈 기자

  • 2018.05.28
  • |
  • null
  • |
  • 강사기고
3. 인상을 남긴 작문

’나무‘는 작문으로 쉬운 주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지원자들이 주제어를 보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얘기했듯, 많은 지원자들이 ’나무=부모‘라는 프레임으로 글을 썼습니다. 작문은 창의적인 글쓰기가 배점이 가장 높습니다. 그리고 평가 위원들은 짧은 기간 동안 수백 개의 글을 읽습니다. 비슷한 주제를 쓴 글은 다른 글보다 인상을 남길 확률이 떨어지겠죠. 그러니 주제어가 주어졌을 때, 일단 주제어와 관련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개념어나 단어들을 메모지에 적고 난 뒤 과감하게 그 개념과 단어를 버려야 합니다. 그 이후에 다시 떠올리거나 한 단계 더 생각을 진행한 개념이나 단어를 가지고 글을 쓰면 좋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말이죠.
글을 하나 보겠습니다.
 
 
서울역 10번 출구를 나와 5분 정도 걸으면 그곳이 보인다. 집없고 돈 없는 이들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신기한 학교. 천대받는 노숙인들이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그곳에서 1년을 보냈다. 교실에 모여 함께 문학, 철학, 글쓰기 공부를 하는 것 외에 ‘선생님’들에게 주어진 규칙이 몇가지 더 있었다. 꼭 인사하기, 함께 저녁먹기, 각자 ‘당번’ 지키기, 설거지, 칠판 청소, 불끄기 등 한 명씩 학교 생활에 필요한 소임을 맡아 책임지고 수행하는 거다. 선생님들의 책임감과 참여의지를 위한 일종의 장치였는데, 덕분에 나같은 활동가들이 자잘한 데 손쓸 필요없이 학교는 원활히 굴러갔다.

권 선생님은 ‘나무에 물 주기’ 당번이었다. 교실에 있는 작은 꽃 화분부터 키큰 나무 화분에 때맞춰 물을 주고 이따금 가지를 솎아주는 일이었다. 학기 초 어둡고 분노에 차 있던 그는 화분이 쑥쑥 자라는 동시에 잘 자란 나무처럼 생기를 되찾아갔다. 봄이 지나 여름이 됐을 땐 자전거 수리 기능을 익히기 시작했고, 물주기 외에 학교의 실무를 솔선수범 도와주는 모범생이 되었다. 글쓰기 소모임에서 부족한 리더인 나를 도와 분위기를 이끌어, 오히려 내가 권 선생님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앞으로는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일기를 보며 그 의지에 힘을 보태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느 가을날 나무들은 제 주인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버지의 기일에 생의 의지를 잃은 권 선생님은 골방에서 연거푸 술을 마시다 쇼크로 사망했다. 상처를 지닌 채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노숙인은 언제든지 몸과 마음의 질병에 쉽게 노출될 수 있음에도, 그의 아픔을 빨리 발견하고 돌보지 못한 나를 원망했다. 어떤 삶은 미처 피어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진다. 쓸쓸한 그의 빈소를 지키며 밀려드는 자책과 죽음의 공포가 괴로웠다. 며칠 서울역에 갈 수 없었다. 다시 마음을 추스려 교실을 찾았을 때 주인 잃은 화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간 방치되어 잎의 끝이 누렇게 변한 나무들에 그 대신 물을 줬다. 이제 연두색 물주전자는 내 차지가 됐다. 권 선생님의 죽음 이후 일주일, 한달, 두달이 지나며 교실은 다시 활기를 찾고 나의 고통도 점차 희미해져갔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씩, 화분 앞에 설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이 따끔거림은 그처럼 허무하게 죽는 이가 계속 나온다면, 희미해질지언정 아예 사라지지 못할 것이다. 나는 주인 잃은 나무 앞에서 다짐했다. 그가 살뜰히 너희를 보살폈듯, 나도 누군가 말라 죽지 않도록 노력하게 살겠다고. 이 따끔거림을 긍정해보겠다고.
 
 
이 글은 개인적 경험담을 담담하게 서술한 글이지만, 사회적 체험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 과정에서 만난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했습니다. 관찰력이 돋보인 글이었습니다. 기자는 관찰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큼 확실한 팩트가 없는데, 같은 현장에 있어도 남들 이상으로 장면을 포착해낼 수 없다면 팩트가 성긴 기사를 쓸 가능성이 큽니다. 이 글은 마무리가 개인적인 다짐으로 끝나서 살짝 아쉽긴 했습니다. 개인적인 다짐은 사회적 메시지로 환원하기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잔잔하게 자신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적 경험담을 다룬 글 중에 돋보이는 글이었습니다.

하나 더 볼까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재개발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바로 ‘집단적 목표’가 ‘개별적 기억’을 압도한 채로 철거와 개발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25년 간 가난한 철거민들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던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하며 집단적 욕망의 속성을 낱낱이 폭로한다. 아이들이 뛰놀던 공터, 저녁마다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마을회관,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거리에서 생선을 팔던 아낙네들의 기억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집단적 구호에 제압당한다. 개인들의 기억은 잘려나가고, 그 자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른 마천루에 비견되는 인간의 욕망이 차지한다.

밑둥이 잘려진 채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나무의 모습은, 철거를 앞둔 주민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단 5분 동안 진행되는 스키 활강 경기를 위해, 5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들을 잘라내는 모습, 바리깡이 지나간 머리처럼 누런 황토빛 흙을 드러내고 있는 산중턱의 모습, 흙 위에 수백년된 고목들이 엉켜져 있는 모습을 보며 철거민들을 내몰았던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본다.

근대 이래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먹고 자란 휴머니즘은 그야말로 강력한 세계관이자 인식의 틀이었다. 인간의 욕망이라면 무엇이든 긍정되었고, 인간의 지성은 그 무엇보다 빼어난 것으로 간주되었다. 휴머니즘의 본질은 다음과 같았다. “단, 인간에게만 허용할 것!”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잘려진 나무들의 모습은 ’인간‘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인간의 욕망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휴머니즘‘의 근본 가치를 천명한 완벽한 선언처럼 보인다. 단 며칠 ’잘 놀아보기‘ 위해, 그리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킬 수만 있다면 잘려진 나무들 쯤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잘려진 나무의 모습들이 공사 중인 산등성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는 인간, 그리하여 인간 욕망의 희생자로 전락한 인간은 잘려진 나무처럼 현실 곳곳에 숨어있다. 우리는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만들어진 옥상의 망루 위에서, 해고자 복직을 위해 올라간 철탑 위에서, 들이닥치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송전탑과 해군기지 아래에서 잘려진 나무들의 모습을 목도한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욕망들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법이라는, 행정대집행이라는 매우 합리적인 방법으로 자행된다.

인간의 범위에서 제외된 모든 인간들은 모두 잘려진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삶의 공간에서 뿌리뽑히고,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밀려나는 나무의 모습이 바로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잘려진 나무들의 사진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 그리하여 그 인간적 고통들을 다시금 느끼는 것은 풍요로움의 기호만을 소비하고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마지막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의 장점은 두 가지 사례를 깊게 들여다봤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사례를 나름의 언어로 분석해서 제시했고, 평창 동계올림픽과 가리왕산 사례에서도 인간의 욕망에 의해 어떤 것이 배제되고 있는지 서술했습니다. 보편적인 사례로 공감을 끌어내려 애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적으로 선명한 주제 의식을 드러낸 점도 돋보였습니다. 사회적인 모순을 다루면서도 조금 감정이 격앙된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끝까지 분석적인 설명을 잊지 않고 담아냈다는 점도 좋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단, 이 글의 단점은 앞의 사례와 뒤의 사례가 어떤 점에서 공통적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개별적 기억’이 어떻게 구분되고, 법을 통해 욕망을 구현하는 자와 그들의 욕망 구현에 의해 배제되는 자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으로 뭉뚱그려져 있지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명확하게 구분지었으면 더 훌륭한 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글도 있었습니다.
 
 
우리 할머니 살던 곳은 강경. 젓갈이 짠내를 품고 마을까지 휘돌아나가는 그곳인데, 유일하게 짠내 없던 곳이 있었단다. 그 아래를 지나가면 풀내음이 나고 웃음내음이 나고 땀내음도 났는데, 그 푸르름이 곱고 예뻐서 무서움도 모른 채 주변을 맴돌았다는 거야. 그래, 맞아. 서낭당. 마을 오래된 나무에 색색으로 천을 달아놓고 기쁜 일, 궂은 일 다 이야기하던 그곳.

할머니의 어릴 적 동무는 서낭당 아래서 만나는 걸 좋아했어. 없는 살림에 모시개떡을 하는 날이 오면 할머니를 불러 반씩 나눠 먹곤 했대. 얘, 희순아. 모시개떡은 왜 이리 서낭당 나뭇잎을 닮았니. 쫄깃한 것이 저 나뭇잎도 맛날 것 같다. 그러면 할머니는 나뭇잎을 따주는 시늉을 했단다.

아직도 모시개떡을 보면 우는 우리 할머니는 그 동무가 한국전쟁 때 죽은 이야기를 해. 북새통에 뿔뿔이 흩어져서는 꼭 저 서낭당 아래서 다시 만나자, 고 이야기했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 희순씨는 매일 그 나무 밑에서 동무를 기다렸는데 결국 아흔이 다 될 때까지 보지 못했다는 거지.

사실 그런 추억은 나도 하나 있어. 서낭당에 모시개떡에, 한국전쟁 이야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주 친했던 학창시절 단짝에 관한 그리움이야. 초등학교마다 미끄럼틀 밑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잖니? 운동장을 쓸고 지나가는 모래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그곳. 풀내음까지는 아니라도 매미소리가 나던 그 나무 아래서 나는 단짝과 불량식품을 나눠 먹었지. 우리 스물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라는 약속이 갑작스런 친구의 이민으로 물거품이 될지는 모른 채.

나는 그 나무를 찾아갈 때마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동무와 그를 생각한단다. 장소도 시간도 다르지만 같은 냄새가 나는 그 밑에서. 손을 가만 대고 있으면 말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 그곳에서. 태어난 너를 품에 안고 처음으로 푸른 그늘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던 그 포근함 속에서.

나는 걱정이 된단다. 네가 컸을 때 과연 이같은 추억을 혹은 아픔을 가질 공간이 있을지. 그곳이 나무 밑이 아니어도 된단다. 어디든 푸르름과 조곤거림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좋으련만. 할머니의 서낭당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밥도 먹고 경사도 나누던 곳이었고, 나의 미끄럼틀 나무는 땀을 뻘뻘 흘리던 사내애들이 숨을 함께 고르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서 눈을 마주칠 수 있던 놀이터가 네게도 있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네가 품에 안을 아이에게도 이 기억의 바통을 넘겨주었으면 좋겠어. 그것이 시대고 사랑히고 사람을 향한 연대란다.
 
 
조곤조곤 설명하는 듯한 문체가 매력적입니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경험담과 자신의 경험담을 설명하는 데 마치 눈앞에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지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들은 아무래도 건조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취재한 팩트를 어떻게 훌륭한 문체로 담아내느냐도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등이 기사 작성의 중요한 기법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글은 할머니와 자신의 경험담을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잘 연결해냈습니다. 어린이집이라는 공간을 제외하면, 더 이상 같은 놀이 공간에서 뛰놀며 공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시대를 세대적 경험을 녹여가며 주제 의식으로 승화시킨 글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읽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습득할 수 있게 배치한 점도 돋보였습니다.

하나 더 보지요.
 
 
4절기가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봄과 가을이 가장 먼저 짧아질 테다. 특유의 봄냄새도, 흐드러지는 가을단풍도 여유롭게 즐기긴 어렵겠다. 기실 과실, 꽃을 품은 나무들에겐 봄과 가을이 일년의 골든타임이다. 그 시간이 지나가면 누구도 더 이상 꽃나무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잠깐의 지극한 화려함과 긴 침울함. 꽃나무는 조울증 걸린 현대인과 닮았다.

잠깐이나마 눈에 띄게 화려하고 싶은 열망. 끝이 보이지 않는 자기계발이란 정언명령에도 이런 열망이 내재한다. 누구보다 화려하고, 남에 비해 더 빛나야 한다는 주문을 들으며 성장해 온 지금 청년세대가 그렇다. 기실 독보적으로 빛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고, 그 화려함 역시 일시적인 경우가 많지만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온 것. 바우만은 이런 ’자아실현 욕구야말로 정신질환적‘이라고 일갈한다. 자아실현이 가능한 소위 ’성공한 삶‘은 하나라는 인식이 기저에 있기 때문이다. 안팎에서 추동하는 자아실현, 성취욕구가 우울의 근원인 셈이다.

욕구과잉은 쓰레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청년세대의 ’잉여문화‘가 그렇다. 상상과 현실이 마찰을 빚을 때 청년들은 무기력하게 내면으로 침잠하며 스스로를 잉여, 곧 쓰레기라 칭하며 자조한다. 잠깐 빛나다가 이내 초라해지는 단풍나무, 꽃나무와 닮았다. 그나마 지금 청년세대에겐 잠깐의 화려함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잉여의 시기가 청소년기부터 장년까지 끝없이 확장된다.

이 때문에 역설적으로 빛나는 건 꽃 없는 소나무다. 기실 소나무는 특색이 없고 밋밋하다. 늘 같은 색과 모양새다. 헌데 이 때문에 오래간다. 묵직하지 않은 작은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소나무의 생은 버티는 삶이다. 하나의 이유로 돋보이는 게 아니라 늘 평범하게 견뎌내는 데서 존재 의미를 찾는 삶. 일반 회사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미생>이 이례적으로 공감을 이끌어낸 것도 대부분의 일상을 정확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청년세대는 생각해본 적 없는 삶이다. 성공 아니면 루저로 단정짓는 분위기 속에서 장삼이사로 머무는 것은 상상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론 대부분의 현실이 될 모습이다.

“영감을 찾는 자는 아마추어이고 우린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 소설 <에브리맨>에서 필립 로스의 말처럼 우리는 생각하고, 후세대에게 가르쳐야 한다. 누구도 특별해질 수 없단 뜻에서가 아니다. 누구나 평범하므로 그 평범한 삶을 하찮게 여겨서도 안 되며, 외려 그 보통 삶의 짐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삶을 인정하는 게 더 나은 보통 사람들의 미래를 기획하는 힘이 된다. 공감대 있는 변화는 그렇게 만들어진다.
 
 
이 글은 메시지가 뚜렷하진 않습니다. 다만 ’나무‘라는 주제어를 바탕으로, 현실 사회의 여러 군상을 다양하게 접목시켜서 서술했습니다. 독서를 많이 해서 사회를 보는 시선의 깊이를 키운 지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어떤 학자나 소설가를 잘 인용한다고 해서 꼭 좋은 글이 되진 않습니다. 어떤 지원자는 유명 학자의 아포리즘을 따와서 인용하고, 그 문장 자체를 근거로 삼아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권위가 있는 인물이 어떤 이야기를 했으니, 우리도 당연히 따라야한다는 식의 전개였지요. 인용을 하고도 인상을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인용을 할 때는 그 아포리즘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왔고, 그에 따라 우리가 함께 생각해봐야 할 지점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의 주장은 이렇다는 식으로 이어가는 방식이 되면 좋습니다. 이 글은 우선 다양한 인용을 하고, 다양한 군상을 나무들과 접목시키면서 그런 무리수를 두지 않아서 신선했습니다. 문장도 간결하고, 분석적이었습니다. 당위를 강요하지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간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글입니다.
 
 
’나무‘가 크게 한 건 올린 사건이 있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우던 금동여래좌상의 모습과 일본 국보 1호인 목조여래상의 형태는 똑같다고 할 정도로 닮아있다. 때문에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서로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것이며 더 나아가 지배의 근거라 주장해왔다. 그러나 일본 목조여래상의 유전자 분석 결과, 한반도, 특히 경북과 강원지역에서만 자생하는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이 일로 한국은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을, 일본은 굴욕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물론 일각에선 아직도 백제가 일본에 바친 진상품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나 고대의 유물, 더 나아가 역사에 대해 양국이 서로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고대 일본과 백제는 현대 일본과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백제와 현대 한국을 비교하면 정치체제나 인구구성, 언어나 문화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문화의 흔적을 살피자면 현대 한국은 민주주의나 헌법을 서양에서 이어받았다. 그러나 서양역사를 우리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같은 피를 물려받은 후손이라는 점은 근거가 부족하다. 심지어 최근 한 다큐멘터리에서는 남쪽 지방 인구의 일부는 코카시안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고구려나 발해의 영토를 가진 중국의 동북아공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일본의 국보 1호가 우리나라 땅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우월감이나 굴욕감을 느낄 근거가 없다. 불상들은 우리 것, 남의 것이라기 보단 백제의 것, 그리고 백제 장인의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옳다. 현재 한·중·일의 외교적 문제가 되고있는 역사문제는 역사를 배타적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는 왜곡이 생긴다. 현재의 주체인 국가의 관점에서 과거를 유리하게 해석하려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위안부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모임에서 한·일 역사가가 배제된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공정하다고 생각하나, 어느새 왜곡된 시각을 취한 것이다.

나무는 대체로 인간 수명보다 오래 산다. 우리가 고목을 신성시하고 그 앞에서 치성을 드려왔던 것도 우리 삶을 뛰어넘는 나무의 역사성 때문이다. 고목 앞에서처럼 우리는 역사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역사가 어느 국가에 귀속될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인류보편적 시각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그러한 시각을 통해 서로의 입장만을 고수하느라 닫힌 동북아관계의 새로운 포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어떠신가요. 우선 역사적인 지식을 다양한 관점에서 풍부하게 서술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정보값을 충분히 취할 수 있도록 해 흥미를 끌게 만들었습니다.

지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관점을 통해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를 소유할 수 없다‘는 주장을 조리있게 펼치고 있습니다.

관점이 신선했습니다. 게다가 이 관점에 대해 사실을 바탕으로 한 객관적 근거도 충실하게 들고 있지요. 그런 면에서 이 글은 앞의 글들보다 좀 더 보편적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주장과 근거를 서술하고 있으며, 뚜렷한 사회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무리 문단에서 다시 한 번 논지를 강조하기보다, 논지를 정리하는 쪽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살짝 있지만, 큰 흠결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