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 시험을 AS해 드립니다] 2. 이런 작문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3)_ 이재훈 기자

  • 201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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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사기고
3) 평면적인 전개와 구성을 피하자.

이런 지원자의 글이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거센 비바람이 부는 날에는 늘 잠을 설쳤다. 또래처럼 천둥, 번개가 무섭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내 고민은 좀 더 현실적이었다. 바로 ‘뒷산의 나무들이 벼락을 맞고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집와서부터 시작된 엄마의 고민이기도 했다. 개조를 하긴 했지만 집이 토대는 본래 서까래와 황토로 지어진 정말 옛집이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에는 늘 할아버지께 “저 나무 좀 기울어진 것 같아요”라며 베어버리자는 떼를 부리기도 했다. 집을 짓기 전까지, 뒷산의 나무는 위협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나무가 몇년 전 유례없던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집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그 광경은 처참했다. 뿌리가 살짝 들리거나 서로서로에게 기댄 채 간신히 서 있는 나무부터 아예 누워버린 나무까지. 동네에서 50년을 넘게 살아온 아버지에게도 이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을 불러 뒷산을 정리하자 산은 금방 민둥산이 되었다. 어찌보면 앓던 이가 빠진 격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금세 문제가 생겨났다. 비만 오면 동네는 어느새 산에서 내려온 흙으로 진창이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이후로 동네는 매우 습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무가 외려 우릴 보호하고 있던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사회 속에서도 위협적인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최전선에서 사회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들이 존재한다. TV에서 무섭고 폭력적으로만 비춰진 시위는 우리 사회 노동의 최저선을 지키는 몸부림이었다. 망루에 올라 시위를 벌였던 여러 노동자들 역시 인권의 최저선을 지키려 싸워온 이들이다. 대학 내 강사들의 지위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김영곤 강사 역시 학생의 교육권과 비정규직 강사의 노동권을 위해 3년 넘게 텐트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속 나무들은 너무나 위태로운 모습이다. 과거의 내가 뒷산의 나무를 위협의 대상으로 여겨 잘라지길 바랐던 것처럼, 투쟁하는 이들을 단지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라 여기는 시선이 다분하다. 세월호 천막을 이제는 거두라는 사람들의 목소리 역시 여기에 속한다.

사회 속 홀로 비바람을 버티고 있는 나무들을 지켜줘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결국 사라진다면, 우리 사회는 크나큰 부작용을 겪게 된다. 누구도 ’나‘의 권리에 대해 관심 갖지 않을 것이며 ’나‘의 인권에 대해 함께 목소리 높여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비탈에 위태로이 서 있는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손을 내밀어야 할 때다.
 
 
하나 더 보겠습니다.
 
 
삶에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물론 진부하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계속 던져지고 있다면 그건 현대인들이 무의미에 노출된 채 부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배격해야 할 것은 진부한 질문이 아니라 진부한 답이다.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고 근본적이다.

우리 현대인들이 삶의 권태를 버티지 못하고 붕괴해버리는 이유. 그래서 끝내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례가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은 가차없이 흐르는데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진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의미를 담지하지 못한 시간은 중력을 잃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때문에 간단치 않은 내 삶의 굴곡들이 개연성 없는 진부한 서사로 채색돼 버리는 것이다. 대지로부터 붕 떠버린 개인의 실존은 자신의 삶의 상투성에 도리질치며 허무주의로 투신해버리고 만다. 여기에 해법은 없는가.

답은 제시할 능력은 내게 없으나 당신과 같은 고민을 늘 붙들고 사는 나에게 이 질문을 풀어낼 실마리를 던져준 순간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내 자리한 바이욘이란 곳을 여행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곳은 엄청난 무게의 돌무더기를 부조한 뒤 축조해 만든 거대한 석상들이 즐비한 사원이었다. 그 돌무더기를 아래로부터 부수고 일어선 나무들이 바이욘 사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무 둘레는 내가 양손을 쭉 뻗어 감아 돌아도 5번은 충분한 너비였다. 이 거대한 나무의 징글징글한 생명력에 순간 아연해졌다. 이 나무는 저 자신의 생명력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족히 10m가 넘는 여러 갈개의 뿌리들을 지상 위에 드러내놓고 바이욘 사원의 석상들을 휘감고 있었다. 시간이 존재를 삼켜버린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받은 충격은 나에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던지 김영하 작가도 이 바이욘 사원의 나무를 모티프로 ‘당신의 나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요컨대, 천년전 하나의 씨앗이 바이욘 사원으로 날아들었고 그 씨앗은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천년동안 한 시도 빼놓지 않고 던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상으로 뻗어나오려할 때마다 이를 누르는 돌무더기 앞에서 자신의 시원에 대한 궁구, 즉 내가 여기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물었고 이를 통해 자신을 키운 토양과 단절하지 않고 굳건히 역사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천년 전의 일이다.

우리의 서사가 맥락도 없이 휘발돼버리는 이유는 어쩌면 바이욘 사원의 나무들이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즉 나는 누구이고 나는 왜 존재하는가와 같은 물음을 너무나 쉽게 놓치고 살아서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나무도 시간의 힘 앞에 수평으로 스러지겠지만 존재의 토양을 잃지는 않았다. 우리도 장구한 시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살아가는 날 동안 무의미를 견디며 하나의 아름다운 나만의 서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나를 있게 해준 근본적인 물음을 늘 붙들고 살아야 할 것이다.
 
 
두 글은 어떠신가요. 첫 번째 글은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이 그 자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차분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눈길의 변화가 자연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닿아야 한다는 당위를 설명하는 주제로 연결했습니다.

두 번째 글은 사유의 깊이가 엿보입니다. 인간의 생명력으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관찰하면서 든 사유를 철학적 어휘를 동원해 잔잔하게 풀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글 모두 뭔가 밋밋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바로 두 글 모두 구성이 매우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이기 때문입니다.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인 글은 두 가지 정도의 이유에서 기인합니다.
첫째, 무턱대고 당위만 강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글이 말하려는 메시지가 단순해집니다. 첫 번째 글은 언제나 집을 덮칠 것 같이 위협적이던 뒷산의 나무가 사라진 뒤에야 그 나무의 소중함을 알 수 있는 현상들이 생겼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적 사례를 통해 한국 사회에도 최전선에서 사회를 보호하고 있는 ’나무‘같은 존재들이 있으니, 이들의 소중함을 느끼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지고 난 뒤에야 소중함을 느낀 뒷산의 나무와 망루에 오른 노동자, 김영곤 강사 등을 단순하게 비교해놓고 둘을 동급으로 이해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떤 당위의 강조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이들이 지키려고 하는 가치를 내가 왜 함께 고민하고 있는지, 이들을 묶을 수 있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무엇인지가 글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런 윤리적 고민 없이 옳고 그름만 당위적으로 강조하면, 읽는 이를 설득할 수 없습니다. 글 쓰는 이가 나의 윤리를 어떻게 구성했는지조차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는 글이 읽는 이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을까요. 큰 고민 없이 즉자적인 비교에만 천착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 단락 구성이 유기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글은 문장과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매 단락은 단락마다 개별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 단락들이 글이 하고 싶은 큰 주제와 유기적으로 묶여서 하나의 글을 구성합니다. 두 번째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굴곡 없이 쭉 한 호흡으로 읽힙니다. 물론 한 호흡으로 읽히는 글이 가진 장점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선 글이 압도적으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글은 단락마다 구성에 신경을 써서, 독자들이 끝까지 흥미를 잃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글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압도적인 깊이보다는 삶의 의미와 권태에 대한 다소 진부한 질문에 대해 어휘력만 앞세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바이욘 사원에서 압도적인 자연을 보고 느낀 점도,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 글도 대체로 모든 단락이 하나의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단락 구성을 유기적으로 하려면, 사례부터 분석과 주장까지 전체 글의 구성에서 적절한 위치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단락별 유기적 구성을 하는 연습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설명하겠습니다.

4) 구체적인 문장을 쓰세요.

지원자들의 글 중에서 몇 가지를 발췌해보겠습니다.
 

 ’더 강하고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인간은 계속해서 더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좋은 성과에 익숙해지자 좀 전에 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어졌다. 자극적인 것을 탐닉하게 되고 강하고 아름다운 것을 위해 달려나갔다. 삶의 재미는 점차 극단의 재미를 향해 치달았다. 그러는 동안 작은 자극에는 무뎌졌다. 기쁨도 슬픔도 그 크기가 크지 않으면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되었다.‘
 
 
 이 문장 어떠신가요? 문장력이 나쁘진 않습니다. 표현이 간결하지요. 그런데 이 글은 저널리즘 글쓰기 문장으로선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성이 전혀 없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더 강하고 정교한 도구’는 무엇인지, ‘좋은 성과’는 무엇인지, ‘좋은 성과에 익숙해지면서’ 만족하기 위해 필요한 ‘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지요. ‘자극적인 것’은 어떤 게 있는지,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또 무엇인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삶의 재미’ 역시 추상적인 표현이고, ‘극단의 재미’ 역시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엇을 얘기하려는지 다가오지 않고 붕 떠있는 느낌입니다.
 

 ‘전라도 어느 지역에 가면 고목이 한 그루 있다. 언제 뿌리 내려는지 아는 사람은 없지만 여하튼 크고 좋은 나무다.’ 
 

이 문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정보값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가 있는 지역도 모르고, 언제 뿌리 내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여하튼 크고 좋은 나무’라고 썼습니다. ‘여하튼’이란 단어는 앞에 나오는 내용이 뒤에 나오는 내용의 근거가 되지 못함을 일컫습니다. 즉, 설득력이 없는 근거를 썼다는 말이 되겠지요. 지양해야 할 표현입니다. ‘크고 좋은’이라는 형용사 역시 추상적입니다. 이 지원자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나무는 몇 명의 사람이 손을 잡아야 둘레를 잴 수 있을 만큼 넓고 고개를 한참 들어야 가장 윗가지를 볼 수 있는 정도로 높다’고 썼습니다. 이 묘사도 좀 더 구체적으로 써주면 좋습니다. 예를 들면, ‘어른 키의 세 배 정도의 키’라든지 ‘성인 남성 허리의 세 배 정도 둘레’라든지 말이죠. ‘좋은 나무’의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은 주관적 감정입니다. 감정을 표현해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면 객관적 근거를 제시해주면 좋겠지요. 이런 표현은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피해야 합니다.

‘여하튼’과 비슷한 표현으로 ‘어쨌든’이 있습니다. 한 지원자는 1문단과 2문단에서 ‘사주팔자’ 이야기를 하다가, 3문단 도입에서 ‘어쨌든 나는 나무라는데, 다른 속성(?)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고 썼습니다.

‘여하튼’과 ‘어쨌든’은 한순간 글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접속사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의 인과관계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기자적 태도로 그리 적합한 건 아닙니다. 명확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한번쯤 의구심을 가져봐야 객관화 작업이 완료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접속사 ‘여하튼’과 ‘어쨌든’은 그런 객관화 작업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접속사입니다. ‘어찌됐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처럼 성의없이 보이는 말이 있을까요.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피해야 하는 단어입니다.